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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위 글은 2004년에 연극 <갈매기>를 보고 적어둔 혼란한 감상기이다. 오늘 4년만에, 같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다시 <갈매기>를 보았다. 처음에 본 <갈매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의 뒤통수에 망치를 휘두르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면, 이번에 다시 본 <갈매기>는, 이번에는 한 번 지켜보리라 두 눈 부릅뜨고 앉아있는 내 눈 앞으로 걸어와서, (표현이 격하지만 이게 가장 느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연방 싸대기를 날리며 서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 한 마디에 한 대씩.
_"야, 야, 여기 봐, 야, 고개 들어, 여기 봐 뭐 해, 야, 자 여기 있어 봐, 눈 크게 뜨고 봐, 야, 야, 이건 뭐야, 그럼 이건 뭐야, 니가 아는 건 뭐야, 야, 정신 차려, 이거 봐, 알어? 알어? 이건 뭐야, 야, 야!"
_글로 적어봐도 제대로 표현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전당에서 돌아 걸어 내려오는 길에 같이 간 친구가 왜 그렇게 비틀거리냐고, 술 마셨냐고 웃었다. 하도 많이 맞아서 얼이 빠졌나 보다. 교감신경이 하도 예민해 져서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지하철 안에서 문장으로 이어 쓸 겨를도 기력도 없어 대강 적었다.

_날카로운 소리가 나도록 유리창을 계속 툭툭 치는 느낌, 연극 내내 계속 이어지는 질문과 의심, 고전을 가져다 놓고 시비를 거는 화면-무대, 조명, 무대 위에 배우가 처한 위치가 만들어내는 화면 자체는 상당히 고전적인 느낌이 나는데 그 안에 놓인 소품, 무대미술, 행위, 동작 같은 것은 하나 같이 비틀려 있는 모양, 예민한 연출가가 만들어 낸 예민한 인물.
_표현이 발상을 따라 잡지 못할 때, 표현했으나 소통할 수 없을 때, 가치를 깨닫고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없을 때, 자신이 보는 세계/원형의 그림자와 세상이 보는 세계/그림자의 그림자가 다르다고 느낄 때 (꼬스쨔가 왜 자살했는가에 대해 이번에는 나름대로 이유를 만들어 볼 수 있었는데, 그걸 언어로 옮겨놓고 나니 저렇게 붕 뜨고 촌스럽고 정교하지 못한 표현이 되어 정말 화가 난다)
_색채와 형태를 통해 표현된 무대의 파격/파형성, 음악의 희화성, 배우 발성과 몸짓의 과장성과 비정형성
_처음에 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체홉에게 시비를 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끝까지 다 보고나니 어쩌면 체홉이 정말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통찰력과 감수성이 천재의 특징이라고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천재가 빛이 나고,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천재와 천재가 만든 것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_전에 쓴 감상기를 찾고, 전에 가져온 브로셔를 찾았다. 2004년 브로셔의 소개글을 조금 옮겨 보자면
"등장인물과 사건의 얼개 속에 체홉이 담아놓은 필연적 동기들이 원래의 모습대로 무대화되어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원작의 색다른 깊이와 비밀을 맛볼 수 있으며, 단 한 줄의 대사, 순간의 포즈까지 밀도 높은 의미분석이 더해져 100년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감동이 우리 무대 위에 재현될 것입니다."
"슈베르트, 슈만, 쇼팽, 구도의 곡들과 러시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가곡들로 구성된 테마곡은 ~ 코러스가 직접 연출하는 살아있는 음향은 색다른 느낌의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_2008년의 브로셔 소개글은 이렇다.
"러시아의 감성으로 만나는 가장 '체호프'적인 우리 시대의 갈매기 - 안톤 체호프는 연극이란 '인생 그 자체'이며 '인생을 탐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삼는다.'는 내용에 충실했던 ~ '인생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불만족과 욕구'라는 근원을 다룬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와 <갈매기>라는 희곡작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수준을 벗어나 새로운 해석을 갈구하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이제 그만의 독창적인 형식과 표현 언어로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선사한다."


_지난 번 <갈매기>의 테마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였다. 무대 한 켠의 피아노로 현장에서 직접 연주되었다.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원곡은 이런 느낌이다.


_이번 <갈매기>의 테마송은 강아지 왈츠와 젓가락 행진곡이었는데, 역시 무대 위 피아노에서 직접 연주되었으나 조잡하고 서툰 솜씨로 배우들이 돌아가며 연주하였다. 테마송의 이 차이가 두 &lt;갈매기&gt;의 성격과 분위기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지난 번 <갈매기>는 '인생이 뭔데?' 를 물었다면 이번 <갈매기>는 그것보다는 '예술이 도대체 뭔데?' 를 더 많이 물어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러시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인상은 '격하고 극적이지만 또한 그만큼 고전적인 것' 인데 지난 번 <갈매기>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에서, 그리고 전체적인 극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갈매기>는 '정체를 알 수 없고, 정체의 규정을 비웃고 되묻는' 현대의 느낌이 난다.
_무대미술 역시 그것을 표현하는 듯 했다. 지난 번 무대는 깊이감과 공간감을 살려 상징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많이 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적인 느낌이란 실제를 재현해 낸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당극과 같은 상징적 배경에 익숙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재현도와 상관없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무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극이 시작되고 막이 올라가는 순간 시각적으로 총격적인 무대가 드러났다. 가짜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과 창은 크기의 비례도 어그러지고 그 사용도 어긋나 어느 것이 문이고 어느 것이 창인지 알 수 없게 되어있었다.벽과 바닥은 명확한 구별조차 없고, 의미도 형체도 알 수 없이 지저분하고 불쾌하게 채색되어 있고, 온갖 곳에 테이프와 비닐이 덕지덕지 붙어 조악한 느낌을 만들어내었다. 그나마도 4막에서는 문도 창도 기둥도 다 없어지고 정체불명의 휑한 구멍이 뻥뻥 뚫린 폐허로 전환되었다. 한 마디로 '무대를 비웃는' 무대였다. 지난 번의 '막을 찢고 나타나는 절반의 무대'는 워낙 인상적이라 의미도 명확히 모르면서 감상기에 적어두었고, 이번에는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까 사실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이런 충격적인 무대가 나타나 놀랐다. 게다가 어지럽게 칠해진 색채들- 탁한 붉은 색과 갈색, 검은 색-이 마치 겹겹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피를 연상시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하고 불길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분위기의 시각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기에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지난번의 무대에 비해서 시각이미지를 통한 표현력은 훨씬 좋았다.
_등장인물이 작가와 배우라는 점, 그리고 다들 어느 정도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부터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지난번에는 '혼란한 감상기'에 적었다시피 각자가 가진 실패와 불만족의 부분을 애써 왁자지껄함으로 덮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어 슬펐던 반면 이번에는 그 실패와 불만족의 부분이 연극과 문학, '예술'이라는 것과 맞물리면서 그것을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에게 되던지는 듯 하여 편치 않았다. 되던지는 형식은 희화와 코미디였고 실제로도 관객들의 크고 작은 웃음을 계속해서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단 한번도 웃지 못했다. 웃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맵고 날카롭게 슬펐기 때문이다. 무대의 시각적 자극도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이건 역시 요즘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요즘 이러저러한 그림들을 앞에 두고 '그래서 그림이 뭔데'라고 묻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 시간이 길다 느낄 새도 없이 '니가 연극을 알아?'라며 싸대기를 맞고 나와서인지, 참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_브로셔를 꺼내 앞에 놓고 보다보니 지난 번도 이번도 문외한인 나도 아는 (유명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꼬스쨔 뜨레쁠레프 역에 오만석이 캐스팅되었고 (세상에 이걸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올해는 김태우(물론 가수가 아니라 배우)가 그 역을 맡았다. 캐스팅도 한번 옮겨보자면 이렇다.

 배역
 2004년 캐스팅
 2008년 캐스팅
 아르까지나
 정재은  정재은
 뜨레쁠레프
 오만석  김태우
 쏘린
 정동환  이호성
 니나
 이혜진  정수영
 도른
 윤주상  남명렬
 뜨리고린
 남명렬  장우진
 샤므라예프
 손진환  최창우
 뽈리나
 추귀정  박명신
 마샤
 이승비
 김소희
 메드베젠꼬
 박종현  김경익


_아르까지나는 같은 배우가 두 번 연기했다. 지난 번 아르까지나는 왕년에 잘 나갔던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나이 든 여배우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는데 이번 아르까지나는 나이가 들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기 싫은 초조하고 예민한 심리를 천박할 만큼 과장된 젊은 외양으로 가리고자 하는 배우의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예민한 연출가의 스타일도 스타일이었지만 '여배우'의 심리를 포착해 낸 것은 배우의 공도 컸던 것 같다. 니나는 지난번에는 목소리로 후반부 인생의 곡절과 처절한 실패를 겪은 후의 변화를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연기도 연기였지만 분장의 변화가 그 부분을 표현하는 데 많은 몫을 담당했다.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4막이, 특히 니나가 돌아온 후의 사건들이 많이 잘려나간 것 같았다. 뜰레쁠레프는 (요즘 오만석의 명성을 생각하면 조금 당황스럽게도) 지난 번의 연기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작가로 표현되었는데 심리와 행위의 급변이 조금 과장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에 자살하는 부분은 심리와 행동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영화 &lt;얼굴없는 미녀&gt;에서도 김태우는 불안하고 예민한 성격의 인물로 마지막에 자살하는 역을 연기했다. 그 영화를 볼 때는 배우의 표정이 보여서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는 표정은 거의 보지 못하고 목소리와 동작만 보아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사실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 배우가 김태우인지도 나중에야 알았다.) 야코프의 변화는 특이할 만 했다. 하인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무대 전환을 맡는 역인데 지난 번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하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스태프'의 모습으로 무대 장치를 전환하고 음향이나 무대 효과를 넣는 모습을 보여주어 훨씬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마샤는 이번에 굉장히 신체를 많이 사용하여 연기하는 모습이 특징적이었다. 그 움직임이 '어떤 것을' '어떤 의미로'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_2층 좌석에서 내려다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상하게 오늘 연극은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이 르네상스 초기 회화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그런 화면 안에 충격적인 것들이 놓이고 그 안에서 충격적인 행위를 하고 끊임없이 비틀며 "그래서 그럼 이건 뭔데"라고 질문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번 관람기나 감상기 같은 것을 적어보려 하지만 글을 정리해서 적어내려가기에는 너무 날이 곤두서 있는 상태라 끝을 맺지 못하고 엉성하게 마무리 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림만 보고 나와도 예민해지고 흥분한 상태가 되는 마당에 이렇게 요란한 연극을 보고 왔으니 오죽하겠는가. 내가 영화나 연극을 자주 즐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_어쨌거나, 이놈의 <갈매기>는 몇 번은 더 봐야 좀 화해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희곡을 읽어보면 좀 다가갈 수 있을까. 희곡은 이보다 더 부드러울까, 아니면 더 도전적일까. 더 관조적일까, 아니면 더 예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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