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 <만종>
안내장이며 각종 광고 매체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줄줄이 써 놓아서 오히려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한데, 하는 청개구리 심보가 생기기도 했다. 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바르비종파 展에 전시되었던 <이삭줍기>는 꽤나 크기가 컸던 것과 비교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림의 첫 인상은 ‘명성보다 보잘것없다’ 였다. 하지만 한 걸음 다가서서 화폭 안의 세상으로 눈을 돌리니, 과연 ‘名不虛傳’ 이었다. 한국 현대시에 (어떤 의미로든) 길이 남을 명구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있다면, 근대 서양회화에는 길이 남을 이미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붉은 종소리’가 있다고 하면 될까. 두 작품 자체를 비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감각적 심상’ 이라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법의 모범답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만종>일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들판과 하늘, 두 농민 부부와 그들 뒤로 떨어지는 석양뿐이다. 하지만 화가는 분명 종소리를 그렸다.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과 석양, 들판이 모두 종소리이고, 기도하는 부부의 숙인 고개와 모은 손이 그대로 다 종소리이다. 그 그림을 보고 산사의 범종소리가 떠오르는 것은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겠지만.
# 르누아르, <줄리 마네>
예전에 본 <피아노 치는 소녀들>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이 그림은 일단 실망스러웠다. 르누아르가 구두 이름인 줄만 알았던 그 때, ‘이 그림 도대체 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참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고 생각했었다. 오동통한 두 소녀를 정말 한번 꼬집어보고 싶을 만큼 색채는 생기 있고, 변화가 부드러웠다. 뚜렷한 윤곽선 하나 없어도 형태가 생생하고 입체감의 표현도 절묘했다. 그 이미지를 상상하고 르누아르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어 빈대떡처럼 둥글펀펀-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소녀의 손이나 안고 있는 고양이는 그래도 좀 괜찮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의 표현이 미흡한 것에 적잖이 실망했다. 르누아르가 자신만의 기법을 다듬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고 마음을 달래본다.
# 베르트 모리조, <요람>
이 그림은 설명에 따르면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했다. 그림은 화려한 기법이나 눈에 띄는 독특한 색채 없이, 잠든 아기가 깨어날 까 조심하는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였다. 전체적인 그림은 명확한 윤곽선이 없이 부드러운 터치로 그려진데 반해 그림의 구조는 잘 짜여져 매우 안정적인 모습이다. 무엇보다 엄마의 시선이 그 안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뭉개진 색깔 약간으로 화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담아내고 있었 다. 이 그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를 알게 된 것은 마네를 ‘발견’ 한 것과 함께 이번 전시회에서 얻은 큰 수확이었다. 그녀와 마네, 그리고 인상파 동료 화가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그녀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이 이것 하나뿐이어서 조금 아쉬웠다.
# 앙리 팡탱-라투르, <사를로트 뒤부르>
이 그림은 ‘초상화’ 이다. 주인공은 빨간 부채를 들고 의자에 앉아 화면 밖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주인공의 얼굴이며 옷, 소매와 목깃의 바스락거리는 섬세한 레이스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모습을 베끼는' 역할에 그야말로 충실하다. 하지만 이 그림은 동시에 동양적이다. 주인공의 눈빛에는 힘이 있고, 입매는 조용하지만 숨겨진 다부짐과 자부심이 배어나온다. 인상파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화가의 작품 앞에서 얼굴과 눈빛을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하고자 했던 동양의 초상화를 떠올려 보았다.
# 피사로, <빨간 지붕, 시골 마을의 겨울 정취>
이상하게 관심이 가지 않던 그림이다. 도록에서 보았을 때도, 전시회장을 보았을 때도 전혀 눈에 띄는 구석이 없었다. 소재 자체는 색이 강렬해 눈에 띌 법 한데도 나무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집을 그린 구성이 산만하게 느껴져 멈춰 서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 에밀 베르나르, <양산을 쓴 브르타뉴의 여인들>
당시는 프랑스에서는 분명 획기적인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그리고 동양 미술 전통에 발 딛고 있는 내 눈에는 그렇게 별스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모델의 복장과 배경의 특수성,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형태는 흥미로웠다.
# 고흐, <아를의 무도회장>, <반 고흐의 방>
<반 고흐의 방>은 <만종>과 함께 이번 전시회 대도록의 표지 그림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나는 초대권 행사 도록은 표지가 전부 <반 고흐의 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꽤나 실망했다. 이 그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색채와 짜임, 붓질,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이루어내는 ‘그림 자체’가 모두 불안하다. 화면은 이상스럽게 적막하면서도 꿈틀대는 듯하고, 하나하나 선명한 색채들의 조합은 불안하다. 소박한 화가의 꿈을 담은 방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화가의 내면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담고 있는 그림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나는 그 불안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다. 싫다. 닫힌 공간에서 웅성대는 많은 사람을 구불거리는 검은 윤곽선으로 그리고 초록빛이 감도는 노랑을 주조로 채색한 <아를의 무도회장>은 더 참기가 어려웠다. 노랗고 매캐한 연기같이 그저 어지럽고 불편할 뿐.
#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화가의 자화상>, <타히티의 여인들>, 세잔, <귀스타프 제프루아>
색다른 그림들이다. 세잔과 고갱은 유명하고 중요한 화가들이지만 이제껏 그 그림의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그림들은 이 두 화가들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후에 이 두 화가의 그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기회를 갖고 싶다. 인상주의에 충실한 그림들은 아니지만, 아주 인상적이었다.
# 함메르쇼이, <휴식>
묘한 흡인력이 있는 그림. 덕분에 네덜란드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관람할 『비엔나미술사박물관 展』이 기대된다. 조용하고 차분한 회색조의 방에 앉아있는 여인의 흰 목덜미는 많은 상상의 여지를 안겨준다.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색조는 목덜미에서 반사되어 빛나는 햇빛과 대조되어 관람자의 시선을 그림 안의 세계로 잡아 이끈다. 때로는 표정이 풍부한 눈동자보다도 침묵하고 있는 뒷모습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마네, <피리 부는 소년>
전시장에서 이 ‘소년’은 그야말로 한 눈에 턱 들어왔다. 실물에 가까운 크기가 다른 그림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왠지 다른 그림들 사이에서 붕 떠오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시장 조명의 탓도, 유명하다는 선입견 탓도 아니었다. 까닭모를 착시 현상에 당혹하여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 전시장을 빙빙 돌며 다른 그림들을 보고 오기를 반복하다 문득 깨달았다. 무대조명이다, 정면에서 강하게 쏘는 무대조명. 그림 속의 소년은 정면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듯 전신의 모든 색채가 밝고 선명하다. 그리고 피리를 든 왼손과 주름진 바지를 빼고는 얼굴은 물론 어디에도 그림자가 없다. 때문에 색채와 색채 사이에도 아무런 완충 장치-대부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명암 표현, 윤곽선 같은-가 없다. 단지 순수한 검은 면과 흰 면, 흰 면과 붉은 면이 온 몸을 부딪치며 만나고 있을 뿐이다. 그 부딪치는 자리에서 색들은 강하게 튀어 오른다. 게다가 모호한 배경색이 소년의 형상과, 명확한 색채를 한층 강하게 밀어낸다. 살아있는 듯 하나하나 튀어 오르는 색채들은 형태를 구성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제각기 독립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듯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검은색과 흰색이다. 전시장의 그림 중 ‘소년’에만 순수한 검은색과 흰색이 남아있다. 그림자와 반사광을 표현한 갖가지 색의 ‘얼룩’이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로 3차원의 가상을 재현하기 위해 각종 기법이 개발되었지만, 마네는 이들을 모두 치워버린 셈이다. 마네가 회화에 눈속임으로 만든 3차원 대신 2차원을 되돌려 주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소년’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여기서 다시 이 그림의 불편함에 대해 말해보자. 그렇다, 이 그림이 불편한 이유는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경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윤곽선 때문에 가위로 오려낸 종이인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이 이유로 그를 낙선시켰고, 현대의 나는 이 이유로 무대조명을 떠올렸다. 어쨌거나 이 그림은 분명 ‘평평하다’. 하지만 소년의 손이나 바지, 피리집을 보면 입체감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차원과 3차원의 불안한 공존. 이것이 이 귀여운 소년이 불편한 이유였던 것이다.
이 기묘한 소년은 피리 연주에는 집중하지도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서서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맞춰보라고 한다. 자신이 캔버스 위에 그려진 납작한 인형인지, 아니면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인지 말이다.